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콘스탄티누스 1세 (문단 편집) === 행정 체계 개혁 === 우선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 이후에도 아직 지역에 따라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았던 민간행정과 군사행정 간의 분리를 확실히 한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 이후에도 지역에 따라서는 문관인 프라이팩투스나 프로콘술이 군대를 이끄는 경우가 많았으나 콘스탄티누스는 이를 더 철저히 분리하였다. 또한 이전까지는 불분명했던 각 관료들의 위계질서도 정리하였다. 즉, 민정 관료 체제는 '''황제 ← 프라이펙투스 프라토리오 ← 비카리우스 ← 프라이토르'''[* 다만, 비카리우스 밑의 관리들이 프로빙키아(속주)들을 통치하는데 이 프로빙키아의 수장들의 명칭은 각 지역마다 제각기였다. 프라이토르도 그 중 하나다. 주의.]란 형태로 일종의 질서가 형성된 것이다. 이중 로마의 프라이펙투스는 다른 지역의 프라이펙투스 프라토리오보다 좀 더 높은 위상을 지녔다. 이러한 일은 군정 장교단에도 일어나는데, '''황제 ← 둑스(임시직) ← 프로콘술 혹은 [[레가투스(로마)|레가투스]] ← 프라이펙투스'''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던 원수정시기 군정 체계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으로 프로콘술이 민정 관료쪽으로 넘어가고 둑스가 지휘하던 각 레기오들의 예하 부대들이 벡실라티오라는 파견 부대들 밑에 헤쳐모이게 된 사실이 정식으로 공인되자 크게 바뀐다. 둑스는 임시직이 아니라 그전보다 규모가 거의 1/4~1/5로 줄어든 변경 부대 레기오 및 필요에 따라 배속되는 정예 대대 및 기병 대대 등을 통할해서 특별 군관구들을 지휘하게 된다. 한편 프라이펙투스는 상황에 따라 규모 500명인 부대, 1000명인 부대 등을 지휘하게 되는데 일단 이건 원수정 때와 크게 다를 바 없다.[* 성경에서 가끔 '천부장'으로도 나오는 이들이 바로 이들이다. 그래서였는지 제국 동부에서는 킬리아코스라는 중세 그리스어 별명이 붙었는데, 로마군의 다른 명칭들이 흔히 그렇듯 이라클리오스 이래로는 정식 명칭이 된다. 물론 가끔 공화정 로마사 덕후인 비잔틴 로마 황제들이 전혀 엉뚱한 라틴어식 이름으로 계급명을 바꿔서 연구자들에게 혼란을 주게도 되지만. 예컨대 고대 로마 때는 대장~중장 격이었던 코메스를 엉뚱하게 당대 비잔틴 군대의 대대 혹은 연대급 지휘관 명칭으로 바꾸거나 하는 등이다.] 한편 야전군 편제에서는 프라이펙투스 위에 코메스가 나타나게 되는데, 콘스탄티누스 시기에 드디어 [[로마 제국]] 말기의 주인공들이란 이름을 얻게 되는 관직인 마기스테르(군사령관)란 관직이 야전군 편제에서 프라이펙투스 위에 나타나게 된다. 즉, 콘스탄티누스 이후 [[로마 제국]]의 군정 체계는 '''황제 ← 마기스테르 혹은 코메스 ← 둑스 ← 프라이펙투스''' 체제가 된다. 이시기에는 마기스테르가 [[보병]]부대 담당(Peditum) 및 [[기병]]부대(Equitum) 담당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이것이 마기스테르 밀리툼으로 일원화되는 것은 [[테오도시우스 1세]] 시기에 들어서였다. 또한 옛 로마 시대부터 내려오던 가부장 처벌권을 크게 제한[* 적어도 관습적으로는 이미 오현제 시절부터 상류층부터 시작하여 유명무실해져가고 있었다. 그러나 법제화해서 명문화한 건 콘스탄티누스가 처음이다.]하였고, [[노예]]에 대한 [[십자가형]]을 전면 금지하였다. [[십자가형]]은 그전부터 유명무실화되고 있었으나 결정적으로 없어진 거나 마찬가지가 된 건 이 조치가 원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노예]]한테도 못하는 걸 자유민이나 상류층한테 맘대로 할 수는 없으니까.) 321년에는 [[3월 7일]]이 마침 일요일이었는데, 그 날부터 모든 일요일을 '경건한 태양의 날'이라는 휴일로 법제화했다. 기독교 얘기는 안 꺼냈지만 기독교에서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하다고 하며, 기독교의 국교화와 맞물려 서양 기독교권에서는 일요일이 휴일이 되었고, [[제국주의]] 시대를 거치며 서양 문화가 전세계로 파급되면서 세계에서 표준적이고 보편적인 휴일이 되었다.[* [[이슬람교]]의 금요일, [[유대교]]의 토요일이 있긴 한데, 세계 표준 등에 있어서는 서구권에 비해 영향력이 거의 없다.] [[원로원]] 의원과 기사 계층 의원에 대한 공직 임명 제한을 완전 철폐했으며, 이에 따라 계급 고려 없이 적재적소에 인재를 배치할 수 있게 되어 행정 체계에 큰 진보가 왔다. 또한 [[원로원]] 의원 수를 대폭 늘려 이 시기에 원로원 의원의 수효는 2,500명에 달하게 되었으며, 그전까지 주욱 하강세였던 원로원의 권위와 명망은 실권은 다 잃었어도 간신히 반등세에 돌아서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